Vol. 3 노산도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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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기운이 완연했던 날, 전라남도 보성 노산마을 초입에 자리한 새하얀 이층집을 찾았습니다. 1층은 노산도방의 작업 공간이고, 2층은 이혜진·홍성일 도예가와 두 딸의 사는 공간입니다. 

오밀조밀 정성스럽게 가꿔진 정원을 둘러보며 짐작했지만, 두 분은 정말 다정하고 곧게 삶을 일궈온 분들이셨어요. 뜨거운 열정을 믿고 보성에 내려왔던 젊은 시절부터, 구들장처럼 은은한 잔열을 머금은 지금까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내려주신 차에도 그 20여 년의 시간이 우러났는지 유독 향긋하고 맛이 깊었어요. 

무언가 창작하는 사람이라면, 혹은 삶을 온전히 살아내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기록을 종종 꺼내 읽게 되실 거 같습니다. 







Q. 노산도방은 어떤 의미를 가진 이름인가요? 

홍성일 이곳은 ‘노산마을’이라는 이름의 보성의 작은 마을이에요. 주변 산자락에 갈대가 많아 갈대 노(蘆)자를 쓰죠. 이 집이 있는 자리도 예전에는 갈대밭이었을 거예요. 혜진 작가님과 함께 작업하며 ‘옹방’, ‘꼳메 공방’, ‘클레이 스튜디오 휴(休)’ 등 여러 이름을 거쳤는데, 2009년에 이 집을 짓고 보성에 정착하면서 ‘노산도방’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어요. 지역명을 사용하는 게 가장 자연스럽고 우리를 잘 설명해 줄 수 있겠더라고요. 말 그대로 노산마을에 사는 부부 도예가가 운영하는 도방인 거죠.


Q. 두 분은 어떻게 처음 만나셨어요?

홍성일 국가무형문화재 96호로 지정된 ‘미력 옹기’에서 문하생으로 지내며 인연이 닿았어요. 저는 옹기를 제대로 배운 후 도예 작업에 접목해 보고 싶어서 내려왔는데요. 60~70대 어르신들 사이에서 흙투성이 작업복을 입고 더벅머리로 지내던 어느 날, 요장에 하얗고 앳된 여학생이 들어오더라고요. 혜진 작가님이었어요.


이혜진 진학을 준비하던 공예과 대학원 교수님의 작업이 옹기와 연관되어 있어서 포트폴리오 준비 겸 옹기를 직접 배워보고 싶어서 보성에 왔어요. 성일 작가님이 먼저 자리 잡고 계셨던 덕에 저도 금세 적응할 수 있었죠. 각자 다른 계기로 왔지만, 요장에서 유일한 20대들이고 통하는 부분도 많아서 빠르게 가까워졌어요. 





Q. 작업에 대한 열정이 엄청난 청년들이셨네요. 

홍성일 뭘 몰라서 가능했던 거 같아요. 보성에 처음 왔던 2000년엔 서울에서 여기까지 차로 7시간이 걸렸어요. 아침 일찍 출발했는데, 가도 가도 끝이 없길래 그제야 살짝 겁이 났죠. 그래도 옹기를 제대로 배워보겠다는 목표는 분명했어요. 대장님마다 다른 노하우를 어깨 너머로 익히고 직접 만들어보며, 데이터를 쌓아야 해서 정말 열심히 했죠.


이혜진 요장에서 2년 정도 옹기를 배운 후, 원래 진학하고 싶었던 대학원의 지도 교수님을 찾아갔더니 오히려 대학원에 굳이 갈 필요가 있겠냐고 하시더라고요. 이미 현장에서 충분히 경험을 쌓은 거라고요. 그 말씀을 계기로, 줄곧 바라 보고 있던 목표에서 시선을 돌리게 되며 인생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졌죠.



Q. 그렇게 보성에 정착하게 되신 거군요.

홍성일 당시 우리는 연인 사이였고, 결혼도 약속한 상황이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혜진 작가님이 진지한 표정으로 그러더라고요. “나는 앞으로 남의 땅에서는 작업하고 싶지 않아.” (웃음) 시골에서 살자는 뜻이었어요. 그런데 사실 저는 타고난 ‘서울 뺀질이’라 시골에 정착하는 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꽤 고민이 됐죠.


이혜진 둘이 어디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다가, 파주부터 경주, 목포, 무안까지, 전국에 있는 공예과 선후배들을 찾아다니며 조언을 들었어요. 여러 이야기를 모아본 결과, 작업은 어디서나 할 수 있고 판매도 자기 하기 나름일 텐데 우리의 성향상 동종 업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은 잘 맞지 않을 거 같더라고요. 그래서 결국 조용하고, 땅값이 싸고, 간섭할 사람이 없는 보성으로 다시 왔죠.








Q. 지금은 왜 옹기보다 다른 도자 작업을 더 많이 하고 계신가요?

홍성일 미력 옹기 요장에서 경험을 쌓은 후, 새로 생긴 옹기 공장에서 총괄 매니저로도 일을 했어요. 생활은 안정적이었지만, 마음 한켠에 ‘지금이 아니면 작업을 시작할 수 없겠다’는 불안함이 있었죠. 결국 과감히 회사를 그만두었는데, 그때가 첫째 아이가 태어난 직후라서 생계도 걱정을 해야 했어요. 

현대인의 생활 패턴 속에서는 옹기의 쓰임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겠더라고요. 널리 선택 받을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 여러 종류의 흙과 작업 방식을 시도해 보기 시작했어요. 보성이 녹차의 고장이니 자연스럽게 차 도구들을 만들게 된 거고요.


이혜진 하지만 노산도방의 뿌리는 옹기에 있어서 다관에 옹기 주둥이 형태를 적용해 보거나, 나뭇가지를 눌러 V자 패턴을 새기는 등, 지금 작업에도 옹기의 특징이 군데군데 녹아 있어요. 전라도 항아리 스타일에서도 영감을 많이 받아요. 

지역마다 항아리의 형태가 다른데, 전라도는 네모난 흙판을 바닥 면에 둘러서 형태를 만들기 때문에 밑면이 좁고 곧고, 어깨는 넓고 둥글죠. 게다가 대학에서 공예과를 전공하던 시절부터 판 작업을 많이 해와서 그런 제작 방식이 익숙하거든요. 이 찻잔도 판으로 벽을 세워서 곧고 단정한 육각형 형태로 만든 거예요.


Q. 노산도방의 작업물은 형태가 정말 다양해요. 특징적인 스타일을 정하지 않고 여러 흙, 유약, 기법을 활용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홍성일 우리나라는 풍부한 도자기 역사가 있다 보니, 참고할 전통과 자료가 정말 풍부해요. 도예작가라면 누구나 고려의 청자나 조선의 백자 같은 전통 양식을 한 번쯤 모티브로 삼아봤을 거에요. 청자나 백자 등 특정 스타일을 전문으로 정해서 과거의 한 지점을 깊이 파고드는 일도 의미가 있지만, 혜진 작가님과 저에게는 지금에 맞는 ‘시대정신’을 찾는 것이 중요했어요. 

고려 시대 사람들이 청자를 만들기로 '선택'한 게 아니라, 그 시대의 정서와 생활 양식이 드러난 결과이잖아요. 20세기 후반에 태어나 21세기를 살아가는 도예 작가로서, 주어진 전통을 지금의 삶 속에서 새로이 복원하고 전승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혜진 노산도방에 확고한 정체성이 없는 게 아닐까 하는 고민을 한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대학원에 진학하지 않고, 서울이 아닌 보성에서 스스로 삶을 개척하겠다고 결심한 순간부터 메인 스트림에서 벗어난 거니까요. 빗겨난 길을 걷게 된 대신에 주어진 폭넓은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죠. 그때그때 다른 재료와 기법을 시도하며, 흘러가듯 작업해 왔어요. 그렇게 25년 정도 시간이 흐르니, 요즘은 어떤 작업을 해도 ‘노산도방 같다’는 이야기를 들어요. 모든 실험과 변화의 과정이 모여 자연스럽게 정체성이 형성되고 있나 봐요.






Q. 혜진 작가님의 ‘작고 아름다운 나의 기물’ 시리즈는 어떻게 탄생했나요?
이혜진 어릴 때부터 평생 도시에서만 살았지만, 늘 자연에 이끌렸어요. 가로수 길에 떨어진 도토리나 예쁜 돌멩이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지금 생활이 너무 즐거워요. 마당을 가꾸며 늘 주변의 잎사귀와 꽃, 열매를 바라보다 보니 작업에도 자연스럽게 반영이 되더라고요. 그렇게 ‘작고 아름다운 나의 기물’이라는 제목으로 작은 오브제 시리즈를 시작했어요. 첫 작업은 꽈리였어요. 어릴 적 할머니 댁에 가면, 아버지가 꽈리를 입에 넣고 ‘깍깍-‘ 소리를 내주셨던 기억이 특별하게 남아 있거든요. 몇 해 전 꽈리 몇 뿌리를 얻어다가 마당에 심었는데, 첫해에 열매가 딱 하나 열렸어요. 선반 위에 소중히 올려두고 들여다보다가, 도자로 만들었어요. 이 작은 합도 참나리나 작약처럼 식물의 씨앗 주머니를 모티브로 만든 거예요. 실제 자연물처럼 저마다 가진 형태와 결이 조금씩 달라요.




Q. 성일 작가님의 도토리를 닮은 개완 시리즈도 눈에 쏙 들어와요.
홍성일 혼자 차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잖아요. 일상에서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차 도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했어요. 개완과 다관의 기능을 함께 담은 실용성과 작은 사이즈, 깔끔하고 친근한 디자인을 고민했죠.
지금은 흙의 질감을 살린 거친 느낌의 버전인데, 앞으로는 차의 종류나 분위기에 맞춰 다른 스타일도 다양하게 만들어볼 예정이에요. 






Q. 보성의 작은 마을에 있는 노산도방을 어떻게 한국은 물론 해외에도 알릴 수 있으셨어요?

홍성일 인터넷 덕분이죠. 우리 때문에 이 동네에 메가패스가 처음 들어왔어요. (웃음) 당시는 온라인 구매가 활발하지 않았고, 도자기는 직접 눈으로 보고 사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어요. 웹사이트를 열긴 했지만, 한 달 매출이 20만 원도 채 안 됐어요. 그러다 스마트폰이 보급되고 온라인 거래가 활성화되면서 조금씩 상황이 바뀌었어요. 홈페이지에 작업물을 올리면 몇 시간 안에 다 팔리고, 다음 업로드 일정을 기다리는 사람들도 생겼죠. 그렇게 노산도방의 이름이 조금씩 알려졌어요.

이혜진 홈페이지 이전엔 블로그로 시작했어요. 성일 작가님이 시골 일상을 기록하던 블로그에 형부의 조언으로 작품 사진을 올려뒀는데, 영어 제목을 달아놓은 게시글에 어떤 차 애호가 외국인 할아버지가 댓글을 다셨더라고요. 그 인연으로 페이팔을 알게 되고, 처음으로 해외 판매도 하게 됐죠.
이후 그분이 아내와 함께 문경 찻사발 축제에 왔다가 직접 찾아와 ‘노산도방을 해외에 소개해 보자’는 제안을 주셨어요. 작업 사진을 모아서 보내면 그분이 고객에게 전달해 주문을 받는 방식이었고, 5년간 함께하며 노산도방의 작업이 세계 곳곳 러시아와 시베리아까지 가게 되었어요. 그때의 송장은 지금도 다 보관하고 있답니다.


홍성일 그 경험을 바탕으로 홈페이지도 영어 버전을 따로 만들어 두었고, 어느 날 영국 바스 지방의 ‘Comins Tea’라는 찻집에서도 연락이 왔어요. 세계 각국의 차 문화를 다루는 책을 준비 중인데, 한국의 자료를 받을 수 있겠냐고요.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한국 차에 대한 영문 자료를 찾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영문으로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던 노산도방과 주변 다원의 정보를 정리해 보내드렸어요. 그 내용이 <Tales of the Tea Trade>라는 책의 ‘South Korea’ 챕터에 실렸죠.


Q. 앞으로는 노산도방을 어떻게 이어가고 싶으신가요?

홍성일 흐름에 따라 유연하게 작업을 이어가고 싶어요. 삶에서 가장 노력하는 게 ‘자신을 규정짓지 않는 것’이에요. 어떤 틀을 정하는 순간, 그 외의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도예가로서 특정 스타일이나 목표를 정하지 않고, 열린 자세로 작업을 계속하고 싶어요.


이혜진 ‘많이 만들지 말자, 필요한 만큼만 만들자’는 생각을 자주 해요. 예전엔 한 달에 큰 가마를 두 번 뗄 정도로 밤낮 없이 작업했고 깨진 도자기를 묻기 위해 포크레인을 부른 적도 여러 번이에요. 이제는 경험이 쌓여 결과를 예측할 수 있게 되었고 무리하지 않으려 하죠. 그래도 여전히 해보고 싶은 것들은 많아요. 작업실에 실험해 보고 싶은 흙과 유약들도 쌓여 있고요. 하지만 성일 작가님 말처럼 천천히 자연스럽게, ‘노산도방다움’을 잃지 않으며 나아가려 해요.